조지아 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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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아 깁스는 미국의 가수이다.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의 딸로 태어나 보드빌 무대에서 경력을 시작했으며,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까지 토미 도시, 할 켐프 등 유명 빅 밴드와 협연하며 라디오 쇼에 출연했다. 1950년 "If I Knew You Were Comin' I'd've Baked a Cake"로 첫 솔로 히트를 기록했고, 1952년 "Kiss Of Fire"로 골드 디스크를 획득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에타 제임스의 "Tweedlee Dee"를 커버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1966년 마지막 앨범을 발표하고 은퇴했으며, 2006년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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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깁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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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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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프리다 립시츠 |
다른 이름 | 해당사항 없음 |
출생일 | 1918년 8월 17일 |
출생지 | 미국 매사추세츠주 우스터 |
사망일 | 2006년 12월 9일 (88세) |
사망지 | 미국 뉴욕주 뉴욕 |
직업 | 가수 |
활동 시기 | 1936년 – 1966년 |
음악 스타일 | |
장르 | 해당사항 없음 |
악기 | 해당사항 없음 |
관련 인물 | |
관련 인물 | 엘리스 라킨스 |
기타 정보 | |
레이블 | 해당사항 없음 |
웹사이트 | 해당사항 없음 |
2. 초기 생애
깁스는 러시아계 유대인 혈통의 4남매 중 막내로 매사추세츠주 우스터에서 태어났다.[2] 그녀가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이후 7년 동안 세 명의 형제자매와 함께 지역 유대인 고아원에서 지냈다.[3]
조지아 깁스는 13세에 보스턴의 보드빌 극장 오디션을 통해 경력을 시작했으며, 이후 '프레다 깁슨'이라는 이름으로 빅 밴드와 함께 투어 활동을 했다.[4][5] 1930년대 후반부터 라디오 쇼에 출연하며 인지도를 쌓았고, 토미 도르시, 할 켐프, 아트 쇼 등 유명 밴드와 협업했다.[7]
어린 시절부터 노래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깁스는 고아원에서 매년 열리는 버라이어티 쇼에서 주연을 맡곤 했다. 두 달에 한 번씩 방문하던 어머니가 산파 일자리를 구하면서 깁스를 집으로 데려왔다. 하지만 어머니는 직업 특성상 몇 주 동안 필코 라디오만 남겨둔 채 어린 깁스를 혼자 두는 경우가 많았다.
3. 경력
1943년, 이름을 '조지아 깁스'로 바꾸고 지미 듀란테와 개리 무어가 진행하는 라디오 쇼 ''캐멀 캐러밴''에 고정 출연하며 "Her Nibs, Miss Georgia Gibbs"라는 별명을 얻었다.[9] 1946년 메제스틱 레코드와 계약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1950년 코럴 레코드에서 발표한 "If I Knew You Were Comin' I'd've Baked a Cake"가 라디오에서 인기를 얻었다.
1951년 머큐리 레코드와 계약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1952년 발표한 "Kiss Of Fire"는 팝 차트 1위에 오르며 100만 장 이상 판매되어 첫 골드 디스크를 안겨주었다.[11][12] 그녀는 토치 송, 로큰롤, 재즈, 스윙, 발라드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다재다능함으로 호평받았다. 그러나 에타 제임스의 "The Wallflower"(깁스는 "Dance With Me Henry"로 발표)나 라번 베이커의 "Tweedle Dee"와 같이 흑인 아티스트의 R&B 곡을 커버하여 상업적 성공을 거두면서, 원곡의 성과를 가로챈다는 비판과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1] 깁스는 훗날 당시 아티스트로서 곡 선정에 발언권이 없었다고 해명했다.
1957년 RCA 빅터로 이적하여 활동을 이어갔으며,[7] 스웨덴 등 해외에서도 인기를 얻었다. 텔레비전 쇼 출연과 자신의 쇼 진행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 1966년 마지막 앨범 ''Call Me''를 발표하고 은퇴했다.
3. 1. 초기 경력 (1930년대 - 1940년대 초)
13세 때 우스터에 살던 프리다는 보스턴의 주요 보드빌 극장 중 하나인 플리머스 극장 오디션에 합격했다. 플리머스 극장 매니저는 이미 그녀가 우스터 지역 라디오 방송에서 노래하는 것을 들었기에, 깁스는 고용되어 보스턴으로 이주했고, 이후 레이모어 볼룸에서 활동했다.[4] 1936년(17세)에는 '프레다 깁슨'이라는 이름으로 허드슨-드랑 오케스트라에 합류하여 10개월 동안 투어를 다녔다.[5] 깁스는 빅 밴드 서킷에서의 고된 삶에 대해 "밤새도록 밴드와 함께 1, 2년 지내지 않으면 외로움을 정말 알 수 없다"고 회상하며, "오전 2시까지 노래하고 버스를 타고 400마일을 운전합니다. 밤에 기름진 햄버거를 먹기 위해 멈춥니다. 마을에 도착합니다. 잠을 자려고 합니다. 일어나서 식사를 합니다."라고 묘사했다.[6]
그녀는 ''Your Hit Parade'', ''Melody Puzzles'', ''The Tim And Irene Show''와 같은 라디오 쇼에 꾸준히 출연했으며,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 초에는 토미 도르시, 할 켐프, 아트 쇼, 프랭키 트럼바우어 등 유명 빅 밴드와 함께 프리랜서 가수로 활동했다. ''빌보드'' 기사에 따르면 그녀가 처음 음반에 참여한 것은 트럼바우어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The Laziest Gal in Town''(브런스윅 레코드 발매)이라고 하지만,[7] 1998년 시미타 엔터테인먼트 컴필레이션 음반의 라이너 노트에는 그녀가 브런스윅에서 드랑의 녹음에 참여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1939년 할 켐프와 함께 녹음한 자료도 존재한다. 그녀의 이름이 처음으로 차트에 오른 것은 1942년 아트 쇼의 밴드와 함께한 ''Absent Minded Moon''(Victor 27779)이었으나,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깁스는 콜 포터의 곡 ''The Laziest Gal in Town''을 처음으로 녹음한 가수로 알려져 있으며, 이 곡은 훗날 1960년대 니나 시몬에 의해 더욱 유명해졌다.[8]
3. 2. 라디오 스타 (1940년대)
그녀는 ''Your Hit Parade'', ''Melody Puzzles'', ''The Tim And Irene Show''와 같은 라디오 쇼에서 꾸준히 활동했으며,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 초에 토미 도르시, 할 켐프, 아트 쇼, 프랭키 트럼바우어의 밴드와 함께 프리랜서로 일했다.[7] 1942년 쇼의 밴드와 함께 ''Absent Minded Moon''(Victor 27779)으로 처음 차트에 진입했지만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1943년, 이름을 조지아 깁스로 바꾼 그녀는 지미 듀란테와 개리 무어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캐멀 캐러밴''에 출연하기 시작하여 1947년까지 고정 출연했다. 개리 무어는 그녀에게 "Her Nibs, Miss Georgia Gibbs"라는 유명한 별명을 붙여주었는데, 이는 미국 팝 음악계에서 상당한 '권위'를 가진 작은 체구의 가수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9]
3. 3. 음반 활동 및 전성기 (1950년대)
1946년, 깁스는 메제스틱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여러 음반을 발표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녀의 첫 솔로 히트 싱글은 1950년 코럴 레코드에서 발매한 "If I Knew You Were Comin' I'd've Baked a Cake"였다. 이 곡은 라디오에서 자주 방송되었지만 음반 판매 실적은 좋지 않았다. 이 시기 그녀는 대니 케이나 시드 시저와 함께 투어를 돌며 보컬리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1951년, 깁스는 머큐리 레코드와 계약하며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녀는 다양한 장르를 소화할 수 있는 다재다능한 목소리를 가졌으며, 토치 송부터 로큰롤, 재즈, 스윙, 발라드, 차차까지 여러 스타일의 곡을 발표하며 호평을 받았다. 특히 1952년에 발표한 "Kiss Of Fire"는 팝 음악 차트 1위에 오르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11] 100만 장 이상 판매되어 깁스에게 첫 번째 골드 디스크를 안겨주었다.[12] 이 곡은 앙헬 비요르도의 탱고 곡인 ''엘 초클로''의 멜로디를 차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깁스는 "My Melancholy Baby", "I'll Be Seeing You", "Autumn Leaves"와 같은 발라드를 선호했지만, 대중적으로는 "Red Hot Mama", "A-Razz-A-Ma-Tazz" 같은 빠른 템포의 곡이나 "I Want You to Be My Baby" 같은 로큰롤 곡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그녀의 1956년 앨범 ''Swingin' With Her Nibs''는 즉흥 연주에 대한 그녀의 재능을 보여주었다.
1950년대 중반, 깁스는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을 커버하여 발표하며 논란을 빚었다. 대표적으로 에타 제임스의 "The Wallflower"를 가사를 수정하여 "Dance With Me Henry"라는 제목으로 1955년 발표했고, 라번 베이커의 히트곡 "Tweedle Dee" 역시 커버하여 베이커의 원곡보다 더 많은 판매고를 올렸다. 이러한 커버 곡들은 당시 백인 라디오 방송국에서 흑인 음악을 거의 틀지 않았던 상황에서 노래를 더 많은 대중에게 알리는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원작자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흑인 아티스트들의 성과를 가로챈다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라번 베이커는 깁스의 커버 활동에 공개적으로 항의했으며, 호주로 떠나기 전 자신의 생명 보험 수혜자로 깁스를 지정하며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당신은 사업을 접어야 할 테니, 나보다 당신에게 이것이 더 필요할 것"이라는 편지를 보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1] 깁스는 훗날 당시 대부분의 아티스트처럼 곡 선정이나 편곡에 대한 발언권이 없었다고 해명했다.
3. 4. 후기 활동 (1960년대 - 은퇴)
1957년, 깁스는 RCA 빅터와 계약을 맺고 활동을 이어갔으며,[7] 은퇴하기 전까지 40곡 이상을 차트에 올렸고 로큰롤 곡으로도 잠깐 성공을 거두었다. 그녀의 이전 머큐리 레코드 시절 발표곡 "Silent Lips"는 스웨덴에서 1958년 9월부터 1959년 3월까지 큰 인기를 얻어 베스트셀러 차트 5위에 올랐으며, "The Hula Hoop Song" 역시 스웨덴에서 1959년 2월부터 3월까지 차트 12위를 기록하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이 시기 깁스는 ''에드 설리번 쇼''를 포함한 다수의 텔레비전 쇼에 꾸준히 출연했으며, 자신의 쇼인 ''조지아 깁스 앤 허 밀리언 레코드 쇼''를 진행하기도 했다. 1966년에는 마지막 앨범인 ''Call Me''를 발표한 후 사실상 활동을 중단하고 은퇴하였다.
4. 사생활
1970년, 외신 기자이자 작가인 프랭크 제르바시와 결혼했다.[13] 제르바시는 이스라엘 총리 메나헴 베긴의 전기를 썼으며, 《팔레스타인은 누구의 것인가?》(To Whom Palestine?), 《이스라엘을 위한 변론》(The Case for Israel), 《진짜 록펠러》(The Real Rockefeller), 《폭력의 10년》(The Violent Decade) 등의 저서를 남겼다. 두 사람은 1930년대 파리에서 처음 만났으나, 12년 동안 연락이 끊겼다가 다시 만났다. 결혼 생활은 1990년 제르바시가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들 사이에는 조지아보다 먼저 사망한 자녀가 한 명 있었다.
2006년 12월 9일, 뉴욕의 메모리얼 슬론 케터링 암센터에서 백혈병으로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유족으로는 남편의 이전 결혼에서 얻은 아들의 아들인 손자 사샤 제르바시, 형제 로버트 깁슨, 조카 패티 터크,[14] 조디 (베이비돌) 깁슨,[15] 그리고 조디의 자매 에이미가 있었다. 깁스의 마지막 인터뷰는 작가 그렉 아담스가 진행했으며, 이후 온라인에 공개되었다.[16]
5. 유산
오랫동안 구하기 어려웠던 깁스의 작품들이 CD로 재발매되면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2006년, 『뉴스위크』의 음악 평론가 캐런 쇼머는 자신의 저서 『위대한 위선자들: 50년대 팝 음악과의 이상한 사랑』에서 깁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나를 완전히 변화시킨 것은 그녀의 R&B 커버 곡들이었다... 조지아는 진정한 로큰롤 감각을 지닌 드문 50년대 여성 가수였다... 듣는 것을 마쳤을 때, 나는 조지아에 대한 건강한 존경심과 비평가들의 무관심에 대한 분노를 느꼈다."[17]
6. 주요 음반 목록
조지아 깁스는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활발하게 활동하며 다수의 싱글과 앨범을 발표했다. 특히 1950년대에 발표한 "Kiss of Fire", "트위들리 디", "댄스 위드 미 헨리 (월플라워)" 등은 빌보드 핫 100 차트 1위를 기록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외에도 여러 곡이 차트 상위권에 오르며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깁스는 솔로 활동 외에도 밥 크로스비, 프랭키 트럼바우어, 아티 쇼, 토미 도시 등 당대의 유명 오케스트라 및 음악가들과 협업하여 다양한 음반 작업에 참여했다. 그녀의 주요 싱글 및 참여 음반에 대한 자세한 목록은 아래 하위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6. 1. 싱글
별도 표기 없는 한, 동일 앨범 수록AC
b/w "Feudin and Fightin"
b/w "Stay With The Happy People" (비앨범 트랙)
b/w "A Little Bit Independent"
두 트랙 모두 밥 크로스비와 함께
b/w "Dream A Little Dream Of Me"
두 면 모두 밥 크로스비와 함께
b/w "Razz-A-Ma-Tazz"
b/w "Get Out Those Old Records"
b/w "Get Him Off My Hands"
b/w "I Wish, I Wish"
b/w "Be Doggone Sure You Call"
b/w "While We're Young"
b/w "My Old Flame"
b/w "A Lasting Thing"
b/w "Make Me Love You"
b/w "The Photograph On The Piano"
b/w "Winter's Here Again"
b/w "If You Take My Heart Away"
b/w "Hes Funny That Way"
b/w "I Love Paris"
b/w "Baubles, Bangles and Beads"
b/w "I'll Always Be Happy With You" (비앨범 트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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